기독교복음침례회의 성경탐구 모임을 돌아보며(1969~현재)

Author : KLEF -관리자- / Date : 2015.11.27 13:11 / Category : About US/평신도복음선교회

초창기 수양회(제1회~2회, 경북 경산군 하양농장) : 69년부터 시작


초창기 역사를 회고해보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기 7:7)는 말씀이 실감난다. 처음 모인 사람들이 몇 사람(150여 명) 안되어 빠짐없이 돌아가면서 구원간증을 나눌 수 있었고 모임의 미래를 설계했던 모임이었다. 대구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자리잡은 하양 농장을 집회 장소로 사용했다. 초가집 한 채와 블럭으로 지은 사과 창고와 오래된 사과나무들과 복숭아 나무, 작은 연못이 하나 있었다. 식당은 초가집 옆에 가건물로 조촐하게 지어졌다. 숙소는 사과 저장 창고에 사과 상자를 깔아 만들었는데 비가 쏟아져서 물에 잠긴 채로 잠을 자기도 했다. 


매미가 울면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매미를 쫓았고 극성스런 모기떼에 시달렸다. 날씨는 덥고 식수는 귀해서 물지게로 물을 실어 날랐다. 마가의 다락방과 같은 곳이라고나 할까. 보잘것없는 장소에 적은 수였지만 생동하는 강력한 말씀의 역사가 있었다. 성경 암송 대회가 있었는데 마태복음을 줄줄 외우는 이들도 있었다.





제3회~5회(71년~73년, 한국 기독교 수양관)


제1회부터 5회 수양회까지는 정말 무럭무럭 자라나는 어린아이라고나 할까 3회 때부터는 인원이 너무 불어나 불광동 기독교 수양관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헤어져 있으면 만나고 싶고 막상 만나면 말은 하지 않아도 왠지 서로 좋은 사람들. 수양회는 참으로 기쁜 축제일이요 명절과 같은 날이었다. 10배 이상으로 불어난 식구들을 수용할 수 있는 숙소와 식당 시설 등등이 고민거리로 등장했던 때다. 큰 텐트를 쳐 숙소를 만들었는데 어느날 밤 비바람이 몰아쳐 텐트가 찢어져서 강당으로 급히 피신하는 헤프닝이 있었다. 우리의 복음 운동에 적극 호응한 팀 선교회라는 외국 단체가 자기들의 방송 매체를 복음 전파에 쓰도록 했다. 이때부터 우리는 한국 평신도복음선교회(Korea Laymen’s Evangelizal Fellowship)라고 이름을 붙였다. 팀 선교부 총재 몰 톤손(Dr. Vernon Mortenson) 박사와 리차드 윈첼(Rev. Richard Winchell) 목사, 죤·W 쿡 목사, 우지·마노 이스라엘 대사 등의 외국인 강사들도 말씀을 전해주었다.






제6회, 9회~12회(서울 여자상업고등학교)



복음이 전해지고 진리의 등불이 밝혀지는 곳마다 어두움에 속한 세력들의 거센 반발도 뒤따르나 보다. 순수한 평신도 복음 전파자인 우리들을 자기들 멋대로 이단으로 몰아 붙이고 훼방하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기 시작한다. 6회 때부터는 수양회 시설이 현대화되어 밥 짓고 국 끓이고 소독하는 데 이르기까지 완전히 기계화가 되었다. 그리고 여러 장소에서 TV 생방송으로 들을 수 있는 그 당시로는 최첨단의 기술이 도입되었다. 

TV가 매우 귀하던 시절이고 수세식 화장실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시절이었음을 가만한다면 시골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 기부터 죽었을 법하다. 제 10회 때는 칼라 TV 모니터가 등장했다. 일반 사회의 수준을 훨씬 앞서 나가는 면모를 보여주었다. 9회때부터는 가건물 축조의 대형화, 기계화를 비롯 식당 콘베어 시스템까지 등장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쌀씻는 기계”를 우리 손으로 만들기도 했다.




제7~8회(대전 충남 여자 상업고등학교)


이 수양회 때는 식수가 귀해서 물을 사서 차로 운반하는 일이 있었다. 6회까지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해마다 모이는 성격에서 7회부터는 불신자들의 참여가 많아짐에 따라 전도집회가 큰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우선 죽어가는 자를 살려놓고 보자는 마음으로 불신자를 위한 복음 전도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8회 때부터는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수양회를 치르는 과정에서 모임 전체적인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비밀인 ‘우리’의 의미를 깨닫는 일들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엡 2:21)





제13~18회(81~86년까지, 서울 휘문 중고등학교)



서울 여상과 휘문 학교는 해마다 수천명의 사람들이 침례를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장소였다. 휘문 학교 수양회 때는 하루에 2만 개씩 빵을 만들었는데 그것도 부족할 정도였다. 

처음에 이 장소를 빌려준 학교 관계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행사를 하는데 행여 학교 건물이나 시설물들이 파손되지나 않을까 걱정했지만 너무도 질서있고 깨끗하게 행사를 치러내는 것을 보고는 육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장소를 빌려주었다. 수양회가 끝나면 모든 것을 제자리에 원위치시켜 놓을 뿐 아니라 시설을 더 좋게 보완하여 주었다. 학교 당국은 흔쾌한 마음으로 재계약을 하려 했는데 우리 집회를 방해하려는 사람들의 계속적인 압력에 못이겨 결국은 우리들이 장소를 옮기는 수밖에 없었다.






제19회~23회(’87년~91년, 청주 실내 체육관)



서울 휘문 고등학교에서 수양회를 치르지 못하게 되자 부득이 지방에서라도 수양회를 치르자는 의논에 따라 제19회부터는 청주에서 궁색하게 행사를 갖게 되었는데 이곳에서까지 우리를 방해하는 온갖 훼방이 이어져 23회 수양회는 그만 행사를 치르지 못하고 중단하게 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우리들의 장소를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이 이때부터 강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제22회 수양회는 올림픽 제1회 체육관에서 치러졌다. 임시로 얻는 장소라 여러 가지 시행착오가 빚어진 수양회였다.






제24~26회(92년~ , 26회 미사리 조졍 경기장, 미사리 워밍업장)



다시 서울로 장소를 옮겨 물 맑고 공기 좋은 미사리에서 수양회를 치렀다. 이때는 모기가 너무 많아 밤새 헌혈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자전거 경기장 건설 관계로 26회 이후로는 이곳에서도 더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제27회~ (95년~ , 안성 세계 선교센터)



온갖 훼방과 역경을 딛고 우리 손으로 마련한 평안과 위로의 땅. 새벽보다 빛나는 풀향기와 초록의 풀벌레 소리가 우리를 반기는 보금자리. 이제 이 세계 선교의 중심지에서 복음의 나팔 소리를 널리 울려 퍼지게 하여 우리들의 남은 때를 알차게 살아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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