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회개와 믿음이 빠진 '깨달음'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Author : KLEF -관리자- / Date : 2019.03.27 14:51 / Category : MEDIA/정정보도 모음

1. 무엇이 오보인가? 

'회개와 믿음이 빠진 '깨달음'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피동적인 깨달음을 촉구한다.' 라는 등 유병언 전 회장에 대해 다수 언론사에서 오보를 냈다. 그러나 해당 내용은 과거 언론보도를 통해 반론보도 되었으며, 본 교단에서 발행한 도서 및 설교 등의 근거자료들을 통해 해당 내용이 사실이 아니며 왜곡된 주장임을 확인할 수 있다. 오보 예시는 다음과 같다.   


출처: 노컷뉴스, [단독] 박진영 전도 집회 건물 경비원, "커튼으로 가려..집회 더 있었다고 들어"



 

2. 보도 VS 사실 


회개와 믿음이 빠진 '깨달음'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피동적인 깨달음을 촉구한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한 사람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이며, 성경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시인하고 그 죄를 통회하는 마음으로 뉘우칠(회개할) 때 비로소 그 모든 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단번에 영원히 대속되었음을 깨달을 수 있다고 믿는다. 죄와 그리스도의 은혜에 관해 지식을 얻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니며, 구원은 회개와 믿음이 수반되며 개인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3. 관련 성경 구절  

골로새서 1: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골로새서 2:2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서 2: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유다서 1:3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베드로후서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4. 관련 서적 및 설교 

권신찬, <양심의 평화>, 기독교복음침례회출판부, p.43-51

2장 빛을 받은 그 사실

1. 암흑의 여정

어느 초겨울 저녁놀이 짙어갈 무렵, 제법 차가운 날씨에 예배당 옆 초가집 안방에서 내 인생의 한 꿈을 어린 가슴에 심어 준사건이 있었습니다. 덜덜 떨면서 한 걸인이 밥을 좀 달라고 찾아왔습니다. 그를 한참 지켜보시던 아버지께서 추우냐고 물으셨습니다. "예-, 춥습니다." 그 모습을 보시던 아버지는 잠자코 그 자리에서 입으셨던 저고리를 벗으시더니 "여기 있다. 입고 가거라" 하시면서 입혀주시던 그 인상적인 모습은 무엇인가 내 가슴에 작은 씨앗이 되어 잊혀지지 않는 감격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 후 아마 5~6년쯤 지난 12세 때, 한 자리에 나란히 누웠을 때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커서 목사가 되어라." 

  이 말씀으로 내 생애의 방향이 정해졌습니다. 아버지처럼 참으로 남을 사랑하는 교회의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어렴풋한 사명감을 가졌던 것입니다. 고향 지방에서는 널리 알려진 일이지만, 아버지는 참으로 사랑이 많으셨습니다. 어려운 사정을 보시면 눈물을 흘리시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호소하셨고, 심지어는 거지를 방에서 함께 재워 온 방에 이가 기어다니는 등 숱한 일화가 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29세에 나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미 목사가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벌써 시작되었습니다. 천사들이 모인 곳인 줄 알았던 신학교와 기숙사에서 받은 상처는 지워지지 못할 상처로 남아 끝내 환멸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졸업 당시에는 안수를 거부하려 했으나, 부친의 책망과 이웃의 권면에 못이겨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해방 후 교회의 내분때문에 갈등은 더욱 깊어갔습니다. 그래서 나만이라도 진흙 속의 옥처럼 이상적인 목회를 해 보리라 다짐을 하고 옷깃을 여미면서 하나님 앞에 맹세했습니다. 새벽이면 두세 시간 울면서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교만한 생각이었을 따름입니다. 

  그러는 중에도 아버지처럼 살아 가리라는 생각에서 이웃 사람, 특히 곤경에 처한 이웃 사람들을 향해서 도움을 주려고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말씀은 언제나 양심의 구석에서 노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행할 수 있는 방법과 힘을 다해서 이웃을 돕고 어려운 사람을 도왔으나, '그것이 네 몸같이냐?' 하는 소리는 날이 갈수록 더해 가기만 했습니다. 어떻게 살았는지 낱낱이 설명하지는 않겠으나, 하여튼 극단적인 방법으로 살았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랬기에 가정에서는 "그렇게 살면서 가정은 어떻게 하라는가?"라는 불평을 들었습니다. 

  어느날 밤, 대구의 어느 골목을 지나다가 거지가 남의 연탄 아궁이 위에 앉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다음날 설교가 완전히 거짓말이 되느냐 아니면 그대로 진실이 되느냐 하는 갈등 때문에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습니다. 집으로 데리고 갈까 하고 망설여 보았습니다. 그러나, 집으로 데리고 가면 온 집안이 발칵 뒤집힐 것이기에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 난감했습니다. 생각 끝에 문득 '됐다! 집에 가서 이불을 한 채 갖다 주자.' 이렇게 생각하고는 집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막상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마음이 동요되기 시작했습니다. 따뜻한 이불 속에 누운 나의 양심에서는 끊임없이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위선자! 위선자! 저 거리를 보라. 얼마나 많은 불쌍한 자들이 떨고 배고파하고 있는가. 그러나 너는 따뜻한 이불 밑에서 잘 자고 아침에는 흰 쌀밥으로 배를 채우겠지? 그리고 설교 단상에서 사랑하라고 소리치겠지? 너는 위선자가 아닌가!' 

  이리저리 생각하다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주일 오전 설교는 단상에 서서 얼굴을 제대로 들지도 못하고 겨우 원고만 읽은 채 지났습니다. 차츰차츰 설교가 싫어지고 설교의 의미를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왜 나는 설교를 해야 하나? 결국은 먹기 위해서가 아닌가? 하나님 맙소사. 먹기 위해서라면 이 세상에 훨씬 떳떳한 방법이 있지 않겠나?' 그리하여 내 생활을 완전히 의미를 잃어 갔습니다. '노동자에게는 생산이 있고 농민에게도 소출이 있는데 목사로서 나의 생산은 무엇인가? 나, 목사는 선한 말을 가장 많이 하고 있으나, 생활에는 그것이 없지 않은가!' 하고 양심은 소리쳤습니다. 

  언젠가 어느 바닷가에서 목사들만의 수양회가 있었는데, 둘러앉아서 방담하는 시간에 나는 동료 목사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 목사로서 목회할 자신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때에 어느 목사가 말하기를 "권목사는 목회의 성공자라고 이름이 났는데, 그것이 무슨 말인가? 권목사가 못 한다면 누가 하겠는가?"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가정의 쌀독에 쌀 두 되가 있으면 한 되는 굶는 자에게 주고 한 되는 먹어야 할 터인데, 나는 그것을 할 수가 없습니다."고 했더니 주위의 목사들이 "아-, 그것은 너무 심각한 이야기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말씀인데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했으나 아무런 대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평신자이거나 또는 설교를 하지 않는다면 모르나, 설교를 하고 남을 가르치고 있으면서 자신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없는 이율배반적인 법칙이 있다는 데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행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설교할 수 있는가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위선이고 거짓말이었습니다. 설교하기가 죽기보다 싫어졌고, 어떻게 목사생활을 포기하고 살아갈 수 있는가만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사상계>를 읽던 중, 어느 분이 "창녀는 먹고 살기 위해 몸을 팔고, 선생은 먹고 살기 위해 지식을 팔고, 목사는 먹고 살기 위해 교회에서 윤리 도덕을 판다. 무엇이 다르냐?" 라는 글을 일ㅇㄱ었습니다. 나는 그 글을 읽으면서 양심이 예리한 칼로 쪼개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습니다. 차라리 창녀가 더 솔직하다. 그는 만천하에 자신이 죄인임을 폭로하고 짓밟히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나는 설교단상에 서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와 같이 모든 존경의 대상이 되었으나, 내 속에도 창녀 못지 않은 죄가 중심에 있지 않은가? 미모의 여성을 보았을 때 비록 육신으로서의 죄는 짓지 않는다 하더라도 마음에는 유혹을 느끼며, 돈뭉치를 보면 욕심이 나지 않은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며칠 후 설교 준비를 마친 토요일 밤에 괴롭고 어두운 양심을 달랠 길 없어 대성통곡했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다른 직업을 주십시오. 아니면 내 생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더 이상 목사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너무 큰 소리로 울었기 때문에 이웃 사람이 무슨 일이 생겼는가 하여 밤 중에 예배당에 찾아온 일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나의 암흑의 여정이었습니다. 


2. 빛을 받은 그 후 

그러던 어느 날, 유럽에서 온 어떤 선교사의 설교를 듣던 중 "여러분 거듭났습니까?"라는 소리에 가슴이 철렁하였습니다. 설교 후 그 선교사와 마주 앉아 일대일로 담판을 했습니다. "나는 믿고 있는데 왜 거듭났냐는 질문에 대답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 때 선교사는 "목사님, 무슨 의심이 있습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그 때 나는 "의심은 없습니다. 나는 확실히 믿기 때문에 지금 죽으면 천국 갈 수 있따고 확신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선교자는 "그러면 됐습니다. 의심없이 천당엘 갈 수 있으면 됐지요."하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나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으나, 마음 한구석에는 그래도 석연치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 후 3주가 지난 1961년 11월 18일 토요일, 아침부터 설교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본문은 로마서 1장 17절에 제목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이며 제 일 대지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기록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이 즉 첫째 대지의 내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3장 21절에는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라고 했는데 이 말씀을 생각하다가,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시며 내가 율법의 의로써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의와 상관없는 하나님의 의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롭게 되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음을 양심 속에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같이 하여야 하는 것은 율법의 의로서 나의 양심을 내리누르는 의였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로써 입혀졌습니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으니라 (로마서 10:2-3) "고 했습니다. 나는 깨달았습니다. 이해에 그치지 않고 양심의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십 수 년간 내 양심을 칭칭 동여매었던 죄의 사슬이 한꺼번에 풀어졌습니다. 문제를 찾으려고 아무리 돌아보아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조금 후에 마음 속 기피 하나님께 참된 감사와 찬송이 흘러 나왔습니다.  "내 죄 사함 받고 구주를 안 뒤에 모든 것이 변화하여서 지금 내가 밟는 길 천국 길이요 주의 피 내 죄를 씻으셨네 나의 모든 것 변하고 그 피로 구속 받았네. 하나님께서 나의 구원 되시니 나의 정죄함 없네. (합동 411)"  이 찬송을 오후 두 시에서 해가 지도록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 후 또 놀란 것은 성경이 전의 성경과 달랐습니다. 모두가 처음 보는 말씀이 되었고 성경이 열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또 이상한 것은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전부가 시시한 것 뿐이었습니다. 내 안에 이루어진 것과 비교하니 하잘 것 없는 것들  뿐이었습니다. 



권신찬, <양심의 평화>, 기독교복음침례회출판부, p.14

어떤 사람은 의지의 힘으로 믿기를 결심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해 가려고 합니다. 곧 의지의 결단력입니다. 다시 말해서 의지적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신 하나님을 참으로 섬기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병언, <요한복음 강해>, 1997. 11. 1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5)" 이 내용을 가지고 물은 무엇이고 성령은 무엇이고 많이들 따집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물로 침례 받는 것이 그 물이라는 말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 말씀의 흐름을 볼 때 말씀으로 거듭난다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강력한 설교를 듣던 사람들이 마음에 뉘우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회개의 세례입니다. 이러한 회개 과정을 통해서 성령이 그 사람의 영혼에 임재한다는 내용을 여기 내포하고 있다고 보아야 될 것입니다. 



유병언, <복음서 강해>, 2000. 01. 20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요한복음 1:9)"  라는 말씀을 봅시다.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있었지만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너희 가운데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의 소리를 듣고,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를 듣고, 마음이 낮아지고, 마음의 평탄 작업이 되었을 때, 회개하고 뉘우쳤을 때, 죄를 자백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었을 때 비로소 예수가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작업을 세례 요한은 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고 있었는가? 참빛이 왔는데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고 사람들에게 왔을 때 각 사람에게 그 빛이 비취려고 하는데 그들이 준비가 안 되어 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은 그 사람들에게 준비를 시켰던 것입니다. 



유병언, <하기수양회 강연>, 2000. 07. 24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누가복음 15:17)"  하는 이 사람의 심정은 오늘날 정신 차리는 사람들이 성경을 볼 때 '하나님이여 당신의 종 선지자들이 기록한 성경은 내 영혼의 갈증을 메꾸고도 남습니다. 내 영혼의 굶주림을 채우고도 남습니다. 그 주님의 일꾼들이 만들어 놓은 이 거룩한 말씀을 먹고 살아도 내 영혼은 그 나라 가기까지 평안히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중략) 이 사람이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돌이킨 일 하나입니다. "내가 일어나"(누가복음15:18) 박차고, 헌 누더기 같은 것 벗어 던지고, 아예 내 현실을 외면해 버리고, 나를 괴롭혔던 모든 문명의 이기, 나를 죄악으로 몰아가는 것이 있었다면 '하나님 이것 말고 당신 품에 안기겠습니다.' 하는 자세입니다. 마음의 회개라 하니 그냥 수동적으로만 마음으로, 십자가에 달린 강도처럼 '마음으로 믿어졌습니다.' 하고 주저 앉을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처럼 능동적으로, 이왕 회개했을 바에야, '주님, 그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이제 나 떠납니다' 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지난 날 나를 즐겁게 했던 것들, 내 육체를 만족케 해 주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하나님에게 위배되는 것을 알았을 때 과감히 불태워 버릴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지 않느냐. 



유병언, <복음서 강해>, 2001. 06. 30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야고보서 2:1)"  믿음을 받았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믿음이 잠깐 필요할 때는 있습니다. 복음을 한참 듣다 보면, '아, 이제 믿습니다.' 하는 생각이 생깁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내가 믿습니다. 주여, 내가 믿습니다.'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내가 먼저인지 주님이 먼저인지 모르지만 순간 믿어져 있는 사실을 압니다. '믿어야지' 하는 각오도 필요했지만, 어느 순간 '아, 되었구나' 무엇인가 끈이 탁 풀린 것같이 이제, 이제 의심이 사라집니다. 의심이 사라졌다, 믿어졌다 하는 새로운 경험이 시작됩니다. 



5. 관련 반론보도문 및 기고문 

뉴스인사이드, 기독교복음침례회(구원파) 및 유병언 전 회장 관련 정정 및 반론, 2014.12.24



이투데이, [기독교복음침례회 및 유병언 전 회장 관련 정정 및 반론보도문], 2014.12.15





본 게시글은 지난 2014년 4월 중순부터 2016년 10월 말까지 310여 곳의 언론사들이 보도한 

16,000여 건의 오보에 대한 정정 및 반론 보도 중에 해당 부분을 발췌한 글입니다.

 

Trackbacks 0 / Comments 0

Calendar

«   2019/07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Statistics

  • Total : 143,567
  • Today : 18
  • Yesterday : 33

Search

Copyright © KLEF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