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례 오대양 집단 자살사건의 조사 결과를 공개합니다

Author : -관리자- / Date : 2024. 12. 24. 16:06 / Category : MEDIA/정정보도 모음

1. 오대양 사건의 개요 

오대양사건은 과거 기독교복음침례회 소속 교인이었던 박순자가 1978년 경 횡경막염증으로 40일간 입원하였다가 퇴원한 후 "나는 신을 보았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다"라고 주장하는 등 광신적 종교신자로 변모하였고, 그 후 '주식회사 오대양'을 설립하고 자신을 추종하는 교인들을 내세워 대전시 일원에서 거액의 사채를 끌어 모아 사업을 유지하다가 채무가 누적되어 파산지경에 이른데다 일부 채권자들을 집단 폭행한 사실로 경찰의 수사를 받게 되어 궁지에 몰리게 되자, 자신을 추종하는 교인 32명과 함께 오대양 용인공장 천정에 은신하여 생활하던 중 절망감을 느끼고 집단자살한 사건으로서 사회에 엄청나게 충격을 안겨 주었으며, 당시 경찰의 수사 결과 위 32명 집단변사자들의 사인은 '자의에 의한 집단자타살'로 결론지어진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4년 후인 1991년 7월, 오대양에서 위 집단변사자들과 함께 생활하였던 생존자 중 일부가 오대양 시절 동료를 구타하여 사망하게 한 후 암매장을 했다는 사실을 실토하며 자수하면서 오대양사건에 대한 전반적인 재수사가 이루어졌고, 이를 틈타 일부 종교인들과 정치인들이 나서서 '오대양 집단변사자들의 사인은 타살이고 그 타살에 배후가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오대양 사건은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으며, 위 집단 변사의 배후에 국민적 의혹이 증폭되자, 검찰이 특별수사반을 편성하여 직접 사건수사를 맡게 되었습니다. 

 

당시 검찰은 '과거에 처리된 사건의 결론에 따른 선입관 등을 일체 배제하고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기 위하여 원점에서 재조사한다는 자세'로 '의문사실에 대한 진상은 철저히 규명함으로써 국민이 품고 있는 모든 의혹을 해소'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수사에 전력을 다 하였으며, 무려 40여일간 150여명의 참고인을 불러 철저하게 수사한 결과 집단변사의 사인은 87년의 수사결과와 동일하게 '자의에 의한 집단자타살'이었고 결국 32명을 죽도록 한 배후는 처음부터 없었음이 최종적으로 확인된 바 있습니다. 

 

지금까지 오대양 집단변사사건에 관하여는 3차례 걸친 수사가 진행되었으며, 당시의 수사결과 발표내용을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2. 3차례에 걸친 수사 결과 발표 내용 

1) 1번째 수사 결과(1987.9 경기도 경찰국의 <용인집단변사사건 종합수사보고>)

14. 종합의견 
이상 수사상황을 종합하건데 사체의 모양이나 현장상황으로 보아 외부로부터 침입살해한 것으로는 볼 수 없고, 변사자 박순자는 사채를 모으는데 자기 직속하에 이선희 외 4~5명의 자금조달책을 두고 그 밑에 개별적으로 중간 조달책 수명씩을 두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많은 차입자를 물색케 하여 사업자금을 조달하였고 또한 직속인 이선희와 조달책 등은 박순자가 주는 3부 이자 중 1부 내지 0.5부씩을 공여하므로 자기들이 끌어들인 차입자가 많을수록 수입이 올라가기 때문에 차입자를 계속 늘리다보니 채무가 점차 불어나 걷잡을 수 없는 상태에서 채권자 이상배의 폭력사건을 계기로 채권자가 점차 증가되며 항의하게 되자 자기를 맹신했던 이선희 및 조달책 등에게 같은 공범자임을 주지시켜 일당 모두를 이끌고 용인 공장에 은신 중 수차 형사대가 급습하는가 하면 가족 등도 찾아와 도저히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자 불안과 초조가 겹치고 또한 집단적으로 은신했던 천정은 스레트 지붕과 거의 맞 닿은 곳으로 한낮의 최고온도가 섭씨 36도 이상을 오르내려 질식할 것 같은 공간에서 주먹밥 소량으로 적량을 취식치 못하여 영양실조 상태에서 기아와 탈진 무기력으로 가사상태에 이르자 전원 죽을 것을 결심 후 남자인 이경수에게 지시 교살하게 하여 이경수 혼자 또는 박순자의 아들 형제와 합동으로 전원을 교살 시킨 후 이경수 자신도 목매어 자살한 것으로 추정됨

 

2) 2번째 수사 결과(1989.1.23 경기도 경찰국의 <오대양사건 재수사 기록>) 

17. 경찰의견 
이상 수사상황을 종합하건데 본 건은 권력과 결탁하였다는 5공 비리와는 관련 사실 발견치 못하였으며, 사체부검 및 현장의 상황과 참고인들의 진술을 종합 판단컨대 천정 내부에 있던 변사자 32명이 먹다 남은 음식물과 대소변을 처리한 용구와 생활도구 등으로 보아 상당 기간을 천정에서 은거하였음이 인정되고, 현장 상황 및 관계인 조사결과 위 천정으로 변사자들이 올라간 후 누구도 내려오거나 침입 살해하였거나, 제3의 장소에서 살해 후 유기하였다고 볼 수 없고 변사자 박순자는 사채를 모으는데 자기 직속하에 이선희와 4~5명의 자금 조달책을 두고 그 밑에 개별적으로 중간 조달책 수명씩을 두게하여 그들로 하여금 많은 차입자를 물색하여 사업자금을 조달하였고,
또한 직속인 이선희와 조달책 등은 박순자가 주는 3부 이자 중 1부 내지 0.5부씩을 자기들이 착복하고 자기들이 끌어들인 차입자가 많을수록 수입이 많아지자 차입자를 계속 늘리다보니 채무액이 계속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불어나고 채권자 이상배의 폭력사건을 계기로 다른 채권자가 계속 항의하게 되자 자기를 맹신했던 이선희 및 조달책 등에게 같은 공범임을 주지시켜 일당 모두를 이끌고 용인공장에 은신 중 형사대가 급파 하는가 하면 가족 등도 찾아오고 변사자들이 자기들이 끌어들인 채무를 변제할 능력이 없음을 인식하고, 도저히 더 이상 견딜 수 없게되자 불안과 초조가 겹치고 또한 집단적으로 은신했던 천정은 스래트 지붕으로 한낮의 최고온도가 섭씨 36도를 오르내려 질식할 것 같은 상황에서 주먹밥 소량도 다 먹을 수 없는 상태로 기아와 탈진, 무기력으로 가사 상태에 이르자 전원 죽을 것을 결심 합의 후에 이경수가 변사자 중 0사람과 함께 합동으로 박순자를 필두로 전원을 교살시킨 후 마지막으로 이경수 자신도 목을 매어 자살한 것으로 인정됩니다.

 

3) 3번째 수사 결과(1991.8.20 대전지검의 <오대양사건관련 종합수사결과> 

(4) 사인 및 사망경위 
○ 결론
- 위와 같은 변사 현장의 상황, 사체부검결과, 현장에서 발견된 메모지의 내용 및 변사 에 이른 경위 등을 종합하면, 변사자들은 4박 5일동안 스레이트 지붕 및 천정의 좁은 공간에서 탈진, 무기력 상태에 이르렀고, 충남도경의 형사대 및 채권자 등이 찾아와 공장을 수색하는 등 상황이 더욱 긴박해졌으며, 마지막으로 기대를 걸었던 삼우측으로부터의 지원가능성도 없음이 명백해지자 박순자는 자기를 맹신 추종하는 다른 변사자들의 동의를 얻어 함께 집단자살하기로 결정한 다음
- 이경수, 김길환 등이 박순자의 지시에 따라 박순자를 필두로 나머지 변사자들을 차례로 살해하고, 그 과정에서 이영호, 이재호는 목을 매고 자살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이 경수가 김길환의 목을 졸라 살해한 후 자신도 목을 매어 자살한 것으로 판단됨

 

3. 1987년 오대양 변사사건 발생 시 언론에 보도된 경찰 발표 

출처: 동아일보 1987년 8월 31일

◇ 경찰수사 = 경찰은 30일 "변사자들이 약물 등을 마신 뒤 혼미한 상태에서 저지른 유사종교적인 「집단자살」사태라고 최종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출처: 조선일보 1987년 8월 30일

경찰은 사체검안결과 이들이 극약을 먹고 동반자살했으며, 이씨가 다시 한 사람씩 확인교살한 후 자신은 목을 매 자살한 것으로 보인다고 30일 새벽 2시 발표했다. 

 

출처: 매일경제 1987년 09월 01일

오대양 대표 박순자씨(48)등의 집단변사사건은 박씨가 사전에 치밀히 꾸민 자살극임이 경찰수사결과 밝혀졌다. 

출처: 중앙일보 1987년 9월 8일

K교파와는 관계없어 

오대양 경찰수사 결과 남편 이씨도 무죄 입증 

오대양 집단자살사건을 수사중인 경찰은 8일 이 사건이 사장 박순자씨(48, 여)일가의 독자적인 종교교리를 바탕으로 사업을 통해 교리를 신장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다른 교파와는 관련이 없으며 박씨의 남편 이기정씨(53)도 이 사건과 직접 관련이 없는 것으로 결론짓고 10일쯤 수사결과를 발ㅍ키로 했다. 

 

◇K교파관련설=수사결과 숨진 박사장이 한때 K파에 몸담고 있었으나 84년 이후에 독립, 이번 사건이 K파와는 무관한 것으로 밝혀졌다. 

 

◇S사·M코리아 관련설=오대양은 S사와 16차례 1억4천5백27만원, M코리아와 17차례 1억9천40여만원의 거래를 했으나 정상적인 상거래로 밝혀졌다. 또 S사와 M코리아는 K파와 무관한 것으로 드러났다. 

4. 현장 부검의 황적준 박사와 이삼재 경정의 인터뷰 외 여러 언론 보도 

1) 황적준 박사 

① 1983년 3월 월간 지방시대 인터뷰 

출처: 월간지방시대 1983년 3월 58면

② 1991년 10월 월간조선 인터뷰 

③ 1992년 7월 5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인터뷰 

 

2) 이삼재 경정

① 1991년 10월 월간조선 인터뷰 

국내 현장감식의 1인자로 꼽히는 이 부소장은 『모든 사건의 해결은 과학적인 현장감식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32명의 죽음에 대해 『31명은 타살되었고 이경수는 자살했다』고 단언했다. 

- 31명이 타살되었다는 것은 자의에 의한 타살, 즉 죽여달라고 했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 결국 이경수를 포함한 모두가 자살했다는 얘기군요.

『그렇습니다. 자의에 의한 집단 자·타살이지요.』 

② 1992년 2월 월간조선 인터뷰 

③ 1998년 7월 5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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